요즘은 어디를 가나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유례없던 펜데믹의 경험과 끔직한 전쟁의 공포, 혹은 세계 경제에 대한 불길한 징후 앞에서 이런 경향은 더 심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도 당장 내일의 미래를 담보해줄 수 없는 급변하는 현실에,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식은 스스로 살아갈 방법을 도모하는 일뿐이라 믿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약육강식의 비정한 현실 앞에서 자신의 안전을 주체적으로 지키려는 이런 전략은 언뜻 당연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각자도생의 전략이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는 데에 있다.
사실, 사회의 현상을 통해 현실 세계의 당면한 문제들을 좀 더 유심히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의 각자도생 분위기에 주목할 필요는 있다. 가령, 로봇이나 인공지능 기술의 괄목할만한 성장이 산업과 경제의 구조를 급격하게 바꿔놓으면서, 직업과 고용의 불안을 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보자. 지난 수십 년간 이어졌던 세계화의 경제 체제가 종언을 예고하면서 시장의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덩달아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는 사실도 떠올려보자. 코로나 펜데믹이 가져온 일상의 변화가 사람들의 관계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잠재해 있는, 예측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각자도생이라는 절박한 분위기를 만들어낸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런 문제들이 결코 어느 한 개인의 힘, 혹은 어느 한 국가의 힘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각자도생의 한계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치, 경제, 외교, 사회, 문화, 산업, 기술 등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 사람들의 삶이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시대에는 전혀 엉뚱한 곳의 사소한 일들이 나에게 커다란 문제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렵채집과 자급자족의 수준을 넘어선 경제 상황에서 각자도생의 삶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처럼, 우리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해결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들의 복잡성과 영향력을 감안하면,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긴요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각자도생의 논리가 사회의 안전망을 훼손하고, 결과적으로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요구하게 된다는 점이다. 자신의 이익을 양보하고 잠시 미뤄두기 보다, 당장의 편의나 손익계산에 골몰할 때, 사회 보편의 가치나 장기적인 목표는 비효율적인 손해로 간주되기 쉽다.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존의 본능만 가득한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의 삶의 조건은 더욱 열악해질 위험도 있다. 그리고 물론, 이처럼 이기심이나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팽배할 때, 사회적 신뢰라는 더욱 중요한 자산이 훼손되고, 공동체의 연대가 깨질 우려는 더 커진다.
요컨대 사회적 자본이 불평등하게 분배된 현실에서, 상호간의 양보와 이해에 기반한 호혜주의는 문제를 해결하는 훨씬 더 효과적인 전략이다. 당장에, 백신을 공급받지 못한 저개발 국가에서 새로운 코로나 변이가 계속 생겨나고, 강대국의 보호주의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회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은 분열과 배제의 상황에서 더 크다. 나 혼자만, 내 가족만, 혹은 내 나라만 행복하면 된다는 각자도생 대신, 사회 전반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한 것도 실은 이런 현실적인 이유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면한 위기와 잠재적인 위험 앞에서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각자도생의 구호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오히려 건강한 연대의 가능성을 되찾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의 격차와 상대적 박탈감이, 안전장치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공장 기계에 끼어버린 어느 계약직 젊은이의 좌절감이, 그리고 일상의 거리에서조차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배신감이 각자도생의 자조(自嘲)를 낳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각자도생의 시대란, 역설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의 연대가 가장 필요한 시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