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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숨결을 간직한 예술의 마을, 서촌
  • 황지혜
  • 등록 2017-03-27 21:18:31
  • 수정 2017-05-04 11:5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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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현대 예술가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북촌 한옥마을은 알지만··· 서촌 세종마을?

 관광지로 유명해진 서울의 대표적인 한옥마을 북촌과 달리 서촌은 우리에게 생소하게 다가온다. 서촌으로 떠나기 전, 아직 우리에게 익 숙지 않은 서촌에 대해 함께 알아보자. ‘서촌’은 정식명칭은 아니지만 경복궁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 붙여진 별칭이다. 세종대왕이 태 어난 마을인 서촌은 2011년에 ‘세종마을’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지 기도 했다. 여기서 잠깐, 세종대왕이 살았던 조선시대의 서촌은 어땠 을까. 당시 서촌은 △상촌 △웃마을 △웃대 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며, 양반계급이 살던 북촌과 달리 중인계층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중인계 층은 지금으로 따지면 통역사인 역관, 의사인 의관 등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전문성을 띤 사람이 주를 이뤘다. 이러한 서촌의 역사는 훗날 서촌이 예술의 마을이 되는 토대가 됐다.

 서촌은 겸재 정선부터 시작해 추사 김정희를 거쳐 근현대의 문인과 예술가들이 거주했던 예술의 1번지였다. 옛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골목길을 천천히 걷다보면 다양한 예술가들의 흔적과 마주할 수 있다. 기자는 영추문부터 윤동주 하숙집 터까지 서촌 구석구석을 탐방하면서 예술의 1번지였던 서촌의 모습을 느껴보기로 했다.

 

 

 서촌 탐방의 시작, 경복궁 서쪽 ‘영추문’을 향해

 영추문은 경복궁의 서쪽 대문이고, 서촌 역사의 시작이다. 1399년 정종 때 경복궁 궁성을 쌓고 △동 △서 △남에 성문을 세웠는데 1426 년 세종 8년이 돼서야 각각 이름이 붙었다. 동쪽의 건춘문이나 남쪽의 광화문은 국왕과 왕족만 지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영추문은 관리들이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대문에 비해서 훨씬 자주 이용됐다. 과거 중인계층들은 영추문을 통해서만 궁궐로 입궐할 수 있었기에 궁궐 서쪽에 모여 살며 지금의 서촌을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영추문에서부터 서촌 탐방을 시작해 보자. 3호선 경복궁역 4번출구로 나와 쭉 걷다보면 자전거 대여소가 보인다. 자전거 대여소 를 오른쪽에 두고 직진하면 영추문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가 자주 접했 던 정철의 관동별곡에서도 영추문을 만나볼 수 있다. 관동별곡의 첫머 리를 보면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고 ‘경복궁 서문 연추문으로 달려 들어가 경회루 남문 바라보며 임금께 하직했다’는 표 현이 나온다. 이 연추문이 바로 영추문이다. 영추문을 보며 다시금 관 동별곡의 구절을 떠올려보자.

 

 시민들의 후원으로 다시 ‘날개’를 단 이상의 집

 영추문을 마주보고 오른쪽에 위치한 골목으로 들어가 직진하면 경 복궁역과 이어진 큰길이 나온다. 큰길에 위치한 우리은행 옆 골목으로 들어가 조금 걸으면 통유리가 인상적인 이상의 집에 도착한다. 이상의 집은 작가 이상이 시 ‘오감도’와 소설 ‘날개’를 집필했던 곳으로 현재 그 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그는 이 집에서 3살부터 23살 까지 20년을 살았는데 그가 2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을 고려하면 그는 이 곳에서 거의 모든 생을 보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건물이 이상이 살았던 집을 그대로 보존한 건 아니다. 낡은 한옥이었던 그의 집과 그 부지를 ‘문화유산 국민신탁’이 ‘재단법인 아름지기’와 시민들의 후원을 받아 매입했다. 이후 이상이 운영하며 많 은 문인들의 토론장으로 이용됐던 다방인 ‘제비다방’을 모티브로 삼아 ‘이상의 집’을 다시 지었다. 이곳에 들어가면 바로 앞쪽에 사람들이 책 을 읽을 수 있게 나무로 된 책상과 의자들이 놓여있고, 왼쪽에는 그와 관련된 서적이 비치돼있다. 가장 안쪽 커다란 검은색 철문을 열고 들어 가면 ‘이상의 방’이라는 어둡고 비밀스러운 공간이 나타난다. 그 곳에 서는 이상의 생애를 담은 영상물을 상영한다.

 

 동양과 서양의 조화, 구립 박노수 미술관

 이상의 집을 나와 오른쪽으로 2분 정도 걸어오면 정면에 금상 고로 케 가게가 보이는데 그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다 보면 큰길이 나온다. 큰 길 바로 오른쪽에 위치한 효자베이커리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가 세 븐일레븐이 나올 때까지 걸으면 박노수 미술관으로 갈 수 있는 이정표 가 보인다. 박노수 화백은 한국 현대 동양화단의 대표적인 화가로, 전 통 속에서 현대적 미감을 구현해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박노수 화백의 가옥은 붉은 벽돌과 흰벽이 잘 어우러진 2층 양옥집으로, 2011년 에 종로구에서 인수해 현재는 종로 구립 박노수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박노수 미술관에서는 박노수 화백과 관련된 다양한 전시가 진행 되니 여기서 그의 그림을 감상해보자.

 

 미술관 내부로 들어가면 일반 가정집에 들어가듯 신발을 벗고 전시 를 관람해야 한다. 현재 <취적(吹笛)-피리소리 전(展)>전시를 진행 중 이며 오는 8월 27일(일)까지 계속된다. 피리소리 전을 대표하는 작품 ‘취적’은 한 소년이 바위에 앉아 피리를 부는 그림이다. 바위의 무채색 과 소년의 채색이 대비돼 더 강렬한 인상을 준다. 전시를 보고 나오면 미술관 바깥도 구경해보자. 미술관 앞에는 박노수 화백의 동상과 함께 그가 이 집에 살면서 가꾸고 직접 디자인한 아름다운 정원이 지금도 보 존돼있다. 손때묻은 집 구석구석과 정원에서 40여 년 간 이곳에 살았 던 박노수 화백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별 하나에 추억이 담긴 윤동주 하숙집

 마지막으로 가볼 곳은 박노수 미술관을 나와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윤동주의 하숙집 터(종로구 옥인길 57)다. 아 쉬운 점은 현재는 터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개발로 인해 집의 원형이 유지되지 못하고 대신 일반 주택이 자리잡고 있다. 집이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재학하며 1941년 5월부터 9월까지 이 자리에 위치한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후배 정병욱과 함께 하숙을 했다. 정병욱의 회고수필인 <잊지못할 윤동주> 에서는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길에 전신주에 붙어 있던 하숙 쪽지를 봤 고, 그곳을 찾아갔더니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다’, ‘우리는 김송 씨의 새 로운 식구가 돼 함께 대청에 앉아 문학을 담론하기도 했고 성악가인 그 부인의 노랫소리를 듣기도 했다’라고 표현돼 있다. 비록 윤동주가 머문 기간은 4개월 정도로 짧았지만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 지금도 사랑받는 작품들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그가 하숙했던 이 공간은 큰 의미를 가진다.

 

Tip! 이상의 집과 박노수 미술관을 찾을 때 참고하자!
이상의 집 운영시간 : 화요일에서 토요일, 오전 10시~오후 11시, 월요일과 일요일 휴무 박노수 구립 미술관 운영시간 : 월요일 제외, 오전 10시~오후 5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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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ng212017-03-28 18:59:36

    황지혜 편집국장 => 황지혜 기자로 바뀌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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