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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위인 (月間偉人)] 탁월하게 용감했던 윤상원
  • 장지원
  • 등록 2021-05-03 09: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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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패배를 뒤로 둔 채 투쟁한 시민군
오는 18일(화)은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다. 혼란스러웠던 그 시절, 자신의 안전보다 국가의 미래를 택
했던 많은 이들의 투쟁이 있었기에 현재의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있었다. 이에 본지에서는 5.18 민주화 운
동과 그 현장에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힘썼던 윤상원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군사 정변 그리고 좌절된 민주주의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 이 사망하자 유신정권은 붕괴됐다. 이로 인 해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커졌으 나 12·12 군사 반란으로 전두환과 노태우 중 심의 신군부 세력이 집권하면서 물거품이 됐 다. 이로 인해 민주주의가 다시 억압될 것이 라는 우려로, 각지에서 활발한 민주화 운동 이 시작됐다. 신군부는 이를 잠재우기 위해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광주로 계엄군을 투입했고, 시민들은 이에 맞서 △계엄령 철폐 △신 군부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광주에서의 첫 충돌은 1980년 5월 18일 계엄군이 전남대학 교 정문에서 집결하기로 한 학생들을 진압하면서 발생했다. 이 충돌로 학생들은 신군부와 계엄군의 만행을 시민들에게 알 리면서 시위를 이어나갔다. 이에 계엄군은 시위대뿐만 아닌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도 무차별적인 진압을 하기 시작해 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화 운동은 전라남 도 전역으로까지 확대됐고 시민들은 시민군을 조직함으로써 계엄군에 맞섰다. 그러나 마지막 27일, 최후의 시민군들이 연 행되고 관련자들이 상무대로 연행되면서 광주의 민주화 운동 은 좌절하게 됐다.


내일의 역사를 만들어간 윤상원


윤상원은 1950년 9월 30일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상원은 1971년 전남대학교 정치외교 학과에 입학했고 민청학련 사건1)으로 징역형을 살았던 김상 윤을 만나면서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졸업 후에는 노동운동을 하던 박기순을 만나 그의 설득으로 들불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0·26사건 이후 ‘민주 노동자 연맹 준비 위원회’에 참여해 본격적으로 민주화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는 5·18 민주화운동에서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무차별 적으로 진압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봉쇄된 광주에서 언론의 역할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에 들불야 학 사람들과 투쟁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투사 회보를 제작했다. 처음에는 열악한 상황에서 제작해야 했지만 25일부터는 YWCA의 지원 으로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진행할 수 있었 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22~25일까지 매일 집회를 열었고 김창길 학생 시민 수습대책위 원장과 집회 논의를 이어갔다. 그러나 ‘무기 반납’과 관련해 뜻이 맞지 않자 박남선, 김종 배와 함께 새로운 도청 항쟁지도부를 만들었 고 26일 기자회견을 열어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의 모든 상황 을 전달했다. 그리고 마지막 27일 새벽, 그는 남아있는 시민 군들에게 무기를 나눠주면서 마지막 인사를 했고 계엄군의 총 탄이 복부를 관통하면서 생을 마감했다.


그 이후의 이야기


그의 시신은 1980년 5월 29일 청소차에 실려 버려졌으며 화상과 자상을 입은 상태였기에 가족들마저도 알아보지 못했 다. 이후 그의 시신은 망월 시립묘역에 매장됐고 1982년 2월 20일에는 망월동 묘역에서 신부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이 이뤄 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불린 ‘임을 위한 행진곡’은 민주화 운동 을 상징하는 곡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광주광역시에서 윤상원 열사의 생가를 보존하고 있는 데 생가의 벽돌담엔 군 복무 중 아버지에게 보냈던 편지글이 적혀져 있다. 그의 편지를 통해 유신독재가 심각하던 그 시절, 깨어 있는 청년 윤상원의 고뇌를 들여다볼 수 있다. 다음은 윤 상원 열사의 편지 내용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해낼 수 있을 것인지 침울한 밤을 새 운 것도 있습니다. 내년에 복학을 하면 어려운 현실과 싸울 작정입니다’

1) 1974년 4월 유신정권의 긴급조치에 의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을 중심으로 180여 명이 구속, 기속된 사건


장지원 수습기자│channy100@kyongg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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