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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호 특집] 본교의 순간들을 기록한 경기대신문 기자들을 만나다
  • 임소연 서울 지국장
  • 등록 2017-04-10 10:15:26
  • 수정 2017-05-04 11:5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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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훈 (경제·86) 현 경기대신문사 동문회 회장

 

Q. 본교 재학 당시의 선배님의 직책과 현재하는 일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경제학과 86학번 김동훈이다. 나는 3학년 때 취재부장을 맡았다. 그 당시 취재부는 지금으 로 말하면 사회팀같은 부서인데, 이슈가 되고 현안이 되는 사안을 기동성 있게 취재하는 부 서였다. 현재는 한겨레 신문사 디지털 뉴스부 기자로 일하고 있다. 경기대신문에 한번 열정을 쏟아 부은 기억이 있었기에 신문사에서의 기자생활 3년은 한겨레 입사에 큰 토대와 밑거름이 됐다.

Q. 경기대신문사에는 어떤 계기로 입사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학교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SNS도 없고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신문 의존도가 높았으며 신문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우연히 본 경기대신문 개강호에서 신문사 모집 공고를 보고 신문사에 지원하게 됐다. 1강의동(진리관) 지하에 있던 대강의실에서 국어 상식 논문 세 과목에 대한 시험을 거쳤고, 신문에 공지된 결과로 최종 합격여부를 알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신문사에 들어가게 된 또 다른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나는 쌍둥이인데, 쌍둥이 형과 다른 고등학교를 나왔다. 86학번으로 경기대에 신입생으로 입학했을 때 형의 고등학교 선배가 학교에서 나를 보고, 내 쌍둥이 형으로 착각해 말을 걸었다. 신문사 사진부장이었던 그 선배는 내게 신문사에 지원해보라고 권유했다. 이렇게 우연한 기회로 학보사에 들어가게 됐지만 곧 신문기자의 매력에 빠져들었으며, 기자라는 직업이 나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Q. 재학 당시 경기대신문의 발행 형태와 마감과정은 어땠는지 듣고 싶다.

 

 지금의 경기대신문은 격주로 한 번 잡지형태로 나온다. 하지만 내가 재학할 당시 신문은 대판 형태로 매주 발행됐다. 4면씩 발행하되 3주에 한번은 8면의 신문이 나오는 4-4-8면의 반복이었다. 또한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 원고를 자필로 200자 원고지에 작성했으며, 기사 마감이 끝나면 경인일보사에 원고를 갖고 가서 조판을 했다.

얘기하다보니 마감 중 정말 마음 졸였던 순간이 생각난다. 당시 신문 1면에는 주마간산이라는 교수칼럼 지면이 있었다. 3학년 어느 날, 일문과의 한 교수님에게 원고지 4~5매 정도 되는 해당 지면의 글을 받았다. 그런데 그 원고를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찔했다. 당시에는 자신이 쓴 기사를 다른 곳에 따로 보관해 놓을 수 없어서 원고를 잃어버리면 정말 큰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신문사 동기 중 일문과 친구를 통해 교수님께 다시 부탁해 글을 다시 받았지만 정말 죄송했다.

 

Q. 신문을 만들면서 학교와 갈등이 일어난 적은 없었는지 알고 싶다.

  3학년 때, 신문을 만드는 도중 주간교수가 이 기사는 못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사회는 조금 진보적인 목소리만 내도 그 주장을 낸 사람을 매도했고,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들이 학교에서 상주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진보적인 주장을 펴기에 굉장히 민감했다. 신문사 기 자들이 반발했지만 그 기사만 백지인 상태로 발행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당시 있던 4개의 학내 언론기관(신문사 방송국 교지편집실 영자신문사)이 연합해 언론출판연합회를 만들었다. 네 개 언론사 학생들이 약 1백 명 정도 됐는데, 인쇄 중단에 맞서 언론자유 쟁취하자라는 혈서를 쓴 뒤 머리띠를 두르고 진리관 앞에서 밤샘 농성을 하기도 했다.

 

Q. 경기대 신문사 동문회장직을 맡게 된 이유를 듣고 싶다.

 경기대신문은 굉장히 역사가 길며 선배들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그것을 후배들에게 계승해 끊임없이 이어가기 위해서는 동문회라는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존에는 신문사 동문회장을 후배들이 맡고 있었다. 그런데 몇몇 후배들이 현직 언론사에 종사하는 선배 가 동문회장직을 맡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나에게 요청했다. 결정적으로 맡게 된 계기는 신문 1000호와 내년에 있을 경기대신문사 창간 60주년 때문이다. 1000호를 맞이한 대학신문이 많지 않기에 본교 신문이 1000회를 맞은 것은 본교가 자랑할 일이며 크게 축하해주고 싶었다.

 

 

 


이진호 (외식조리·01) 800호 전 편집국장

 

Q. 본교 재학 당시 선배님과 현재 어떤 일을 하시는지에 대해 듣고 싶다.

 외식조리학과 01학번 이진호라고 한다. 입학 후 경기대 신문 사에 지원했다. 사실 신문사에 들어가기 전에는 기자라는 직업을 알지도 못했고, 꿈꿔 본 적도 없었다. 당시만 해도 내 꿈은 요리사였고, 신문사는 대학 생활의 색다른 동아리 활동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문사가 이렇게 내 인생을 바꿔 놓은 계기가 될지는 몰랐다. 외식조리학과 전공으로 졸업했지만, 그 분야로 취업하지 않고 경기대신문사 활동에 영향을 받아 한국경제 매거진에서 발행하는 대학생 전문 매체인 <</span>캠퍼스 잡앤조이>의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Q. 경기대 신문사의 편집국장직을 맡고자 한 계기를 알고 싶다.

 

 경기대 신문을 전국 대학 최고의 신문으로 만들어 보자는 포부가 있었다. 또 신문사 후배들이 더 좋은 신문을 제작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해마다 후배 편집국장에게 전 했던 이야기가 있다. 그 중 하나는, ‘그 자리는 가장 먼저 신문사에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자리라는 말이다. 나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편집국장을 맡았다. 원칙적으로는 편집국장 임기는 3학년 1년이지만, 3학년 후배 자리가 공석이 되는 경우가 생겨 이후 편집국장을 몇 번 더 맡기도 했다. 그래서 3학년 4학년 대학원을 다니면서 편집국장을 맡았던 경험이 있다. 아마 내가 신문사를 통틀어 가장 오래 편집국장을 한 사람일 것이다.

 

Q. 경기대신문을 발행하는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말해달라.

 3명이 신문을 만들었던 시절이 기억이 난다. 해마다 신문사 기자들이 몇 명이 활동하는지가 항상 중요했다. 학업과 신문제작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업과 취재가 겹칠 때면, 수업을 포기하고 취재를 가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많은 기자가 임기인 3년을 채우지 못했고, 어떤 해에는 결국 모든 기자가 신문사를 그만둬 3명이 신문 제작을 했다. 당시 신문에 내 이름이 많이 등장했을 만큼 신문제 작을 위해 학교를 다녔던 시절이다. 그래도 몇 년 뒤에는 30명의 기자들이 활동할 만큼 번창하기도 했다.

 

Q. 경기대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가장 학생들의 관심도가 높았다고 생각하는 기사와 기억에 남는 기사를 꼽아달라.

  학생들의 관심이 가장 높았다고 생각하는 기사는 등록금 시위 기사다. 당시에는 해마다 연초가 되면 학생들이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며 시위했다. 등록금이 합리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총장실을 점거하거나, 본관 앞에서의 삭발 시위도 있었다. 이런 영향으로 본교는 주변에서 가장 낮은 등록금을 유지했다. 당시 등록금 시위가 일부 학생들만의 행동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학교의 언론기관인 경기대신문이 그 소식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기사는 총학생회 선거 관련 기사다. 당시 총학생회 선거는 투표율 저조로 보궐선거가 이어졌다. 투표율 50%을 넘기지 못하면 단과대학 학생회뿐 아니라 총학생회가 건설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학생회는 학생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기구인데, 그 단체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신문사에서 직접 투표에 참여하겠다는 서명운동을 진행해 약 2 천명 학생에게 서명을 받고, 이름을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다.

 

Q. 본지 1000호에 대한 축하 인사와 후배기자들에게 조언 한마디 부탁한다.

신문에는 그 시대의 역사가 남아 있다. 본교의 지난 역사 또 한 경기대신문에 담겨 있다. 그 역사를 1000개의 신문에 담아 온 모든 기자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앞으로도 그 역사를 이어갔으면 좋겠다. 누군가 나에게 기자의 매력 중 세 가지를 꼽으라면, 인맥 경험 결과물(신문)을 꼽을 것이다. 기자만큼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인맥과 경험이 신문이라는 결과물로 담긴다. 후배 기자들이 대학시절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보낼 수 있는 이 시기를 즐겼으면 좋겠다. 이번 호가 마무리되고, 1001호부터 여러분만의 색깔로 경기대신문을 또 다시 잘 만들어 주길 부탁한다.

 

 

 


권명림 (경영·08) 900호 전 편집국장

 

Q. 경기대 신문사에 들어가게 된 동기 및 현재 어떤 일을 하는지 듣고 싶다.

 

  2010년도 편집국장을 맡았던 경영학과 08학번 권명림이다. 나는 개강호 신문을 보고 색다름을 느꼈는데, 집에 배송되는 일반 일간지와 달리, 크기도 작고 잡지 같은 신문이 예뻤기 때문이다. 이에 흥미가 생기기도 했고, 기사 쓰는 것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글쓰기에도 관심이 있어 신문사에 발을 들이게 됐다. 현재는 신문사와 관련된 직업이 아닌 아동미술 퍼포먼스 교사로 일하고 있다. 성인을 대상으로 미술심리 강의나 상담도 진행한다.

 

Q. 본교 신문사 기자 시절, 대학 분야의 기사를 주로 작성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유가 있는지 알고 싶다.


  우스갯소리로는 선배들이 다른 팀에 안 보내줬다고 말하겠지만 사실 학기마다 신문사 내에서 부서 지원을 할 때, 2년 동안 대학팀을 1지망으로 지원했다. 이는 선배들이 내 의사를 존중해준 결과다. 처음에 대학팀을 지원하고 싶던 이유는 대학팀이 대학신문의 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취재를 할수록 대학은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대학에서도 사회와 똑같은 이해관계가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속에서 취재하고 알아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그래서 다른 팀으로 가지 않고 계속 대학팀을 지원했다. 대학팀이 다른 팀에 비해 바쁘긴 했지만 2주마다 발행되는 신문은 나에게 엄청난 성취감과 힘이 됐다.

 

Q. 경기대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신문은 무엇인가.


  편집국장을 맡고 처음 낸 신문이었던 894(10.03.02 발행) 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2010년 개강호는 표지를 통해 신선하게 다가가고 싶었다. 당시 신 사 회의를 서울캠퍼스에서 진행할 때였 는데, 서울캠퍼스를 돌아다니다 학교를 탐방하던 새내기를 만났다. 교복 입은 여학 을 데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 점프하는 사진을 찍은 뒤 등 뒤에 날개도 그려 개강호 표지를 만들었다. ‘새내기 캠퍼스를 날아라라는 제목이 아직까 지 기억난다.

 

Q. 경기대신문 900호를 발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 부탁한다.


  900호는 개강호와 더불어 가장 기억나는 신문이다. 900호 발행이 학기 중에 있어서, 보통 신문을 만들 때처럼 회의하고 발행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이에 국·팀장이 정해지고 나서부터 900호에 대한 얘기를 계속했다. 총장을 찾아갔던 일도 기억에 남는 다. 학생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경기대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기획을 짜다보니 신문 지면이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총장을 만나 얘기를 나눴고, 84페이지의 컬러지면으로 구성된 신문을 만들기로 했다.

 정기자들에게는 방학중 워크샵에서 900호 구성에 대한 얘기를 했다. 기자들이 기겁하고 도망가려 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900호 신문 내용 중 구성원들에게 듣는 경기대라는 코너가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본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인터뷰 한 지면이다. 사실 인터뷰하면 학교 내 구성원만 생각하는데, 마 을 주민뿐만 아니라 스쿨버스 기사, 카페 알바생 등 여러 사람들이 학교와 연관돼있다. 이 기사를 쓰기 위해 기자들이 발로 많이 뛰었는데, 그래서인지 가장 기억에 남는다.

 

Q. 신문사 기자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렵게 취재했던 기사가 있는지 궁금하다.

 

  2학년 정기자 때 경기대 역사진단 프로젝트라는 주제로 본교의 역사와 관련된 시리즈 기사를 쓰자는 얘기가 나와서 내가 맡겠다고 한 적이 있다. 처음 시리즈에서는 경기대첩을 다뤘다. 사실만 말해주기에는 너무 딱딱할 것 같아서, 오원택(관광경영·92학번) 학생의 영혼이 얘기하는 형식으로 글을 구성했다. 역사를 얘기할 때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떻게 객관적으로 전달할 것이냐라는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기사와 관련해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시사in에서 대학 기자상 공모전이 열렸고 내 기사를 제출했다. 비록 나는 상을 받지 못했지만 경기대신문사에서 다른 기자가 상을 받아 시상식장에 방문했다. 그곳에서 시사in 편집국장에게 내 기사가 완전한 기사형식이 아니라 상을 주진 못했지만 기자들 사이에선 평가가 좋 았고, 대학신문의 정신과 취지가 좋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때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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