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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주머니? 그게 뭔데?
  • 편집국
  • 등록 2022-04-11 09:5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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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선 (진성애교양대학 교양학부)


 인간이 가진 수많은 감정 중에 ‘분노’(화)만큼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감정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듣게 되는 ‘분노조절 실패’, ‘분노조절 장애’라는 말들만 보더라도 분노는 절제해야 하는 것이고 표출해서는 안 되는 감정이라는 암시가 깔려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다른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명유지에 꼭 필요한 분노 감정에 이처럼 부정적인 암시가 배어있는 것은 아마도 아주 오래전부터 ‘분노’와 ‘폭력’을 함께 연상시키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이념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한 모든 사람이 폭력을 행사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폭력 행사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입니다. 실제로 분노는 ‘비꼬기’에서부터 ‘무관심’과 ‘태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됩니다. 그런데 우리 대다수는 눈에 띄는 폭력이 결여된 분노표현을 분노 표현으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타인의 화풀이 대상이 되기도 하고, 우리 또한 타인을 우리의 화풀이 제물로 삼습니다. 


 왜일까요?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성별과 무관하게 자신이 분노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한다고 합니다. 그 원인 중 하나를 찾자면, 우리 사회가 ‘분노하지 않는’ ‘성숙한’ ‘인간상’을 우리에게 은연중에 강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상적인’ ‘인간상’에 부합하기 위해서 분노를 창조적으로 승화하거나 절제하고, 절제하다 못해 억제해야 된다고 스스로 세뇌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위 ‘성숙한 인간’이란 ‘가면’을 쓰고 살아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한 번 생긴 ‘분노’ 감정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우리의 마음 속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해소되지 않은 분노의 찌꺼기를 저장해 두는 주머니를 하나씩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성숙도나 환경에 따라 그 주머니의 크기에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무한히 늘어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억제할 수 있는 분노의 분량은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으니 ‘분노’를 무조건 억제해야 된다는 생각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마땅히 분을 내야할 때조차 분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억울하고 부당한 대우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신분이나 체면 때문에 당장에 분을 내지 못하고 자신의 분노에 전혀 책임 없는 이들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를 비유한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빈번하게 목도되는 ‘가정 폭력’이나 ‘묻지 마 범행’은 이처럼 방향이 바뀐 분노 표출의 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재적으로 이보다 더 큰 부작용이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저질러지는 부당하고 불공정한 행태에 대해서 우리가 공분하지 않고 침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아무런 해를 미치지 않을 것 같은 문제, 참견하면 나의 삶이 고단해질 것 같은 그런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분노하지 않고 눈감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분노를 표출해야 된다는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했듯이 정말 어려운 일은 때에 맞게, 마땅한 사람에게, 타당한 목적으로, 그에 합당한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분노가 일었을 때, 그 분노의 감정을 무조건 억제하고 등한시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무엇 (누구) 때문에 화가 났는지 그 원인을 따지고 인정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분노의 잔재가 내 안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분노 주머니는 어떤가요? 이 질문에 “분노 주머니? 그게 뭔데?” 라고 반응한다면, 당신은 아직 분노의 감정을 밀어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당신의 해소되지 않은 분노의 잔재들이 그냥 방치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오늘이라도 당신의 마음 속 분노 주머니를 한 번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곳에서 왜곡된 방향으로 분출될 수 있는 분노의 찌꺼기들이 당신의 관심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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