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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특집]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발자취
  • 김화연
  • 등록 2021-11-09 09: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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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학원자주화운동(1983~1989)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뜨겁던 19831221, 학원사태와 관련돼 제적된 학생들의 복교가 허용됐다. 이어 정부는 학원자율화조치를 시행해 주요대학에 상주하던 전투경찰을 철수시켰다. 그 결과 본교에서 본격적인 학원자주화운동이 시작됐다. 1983년에 종합대 승격좌절 이후 재단에 대한 조직적인 문제 제기가 시작됐고 전면적인 재단 퇴진투쟁이 진행된 것이다.


 1989년에는 신입생 등록금 문제 기부금 입학 문제 교수자녀 입시부정 등을 발단으로 재단퇴진투쟁이 전개됐고, 재단은 나민수 총장을 전격해임했다. 이에 약 280일간 장기투쟁이 진행됐지만 학생 지도부들이 구속돼 투쟁동력이 상실됐고, 운동부연합회 등이 투쟁세력을 상대로 폭력을 본격 행사했다. 결국 일부 운동부 직원 교수 등 친위세력이 포진한 손종국 이사장 체제가 구축됐다.



1990년대의 학원자주화운동(1990~1993)


 1990년 민주자유당이 사립학교법을 개악하면서 대학가에서는 교수재임용 논란과 재단의 부정비리가 횡행했다. 본교에서도 손 총장과 그 친인척들의 총장 취임이 가능했다. 이에 재단에서 나민수 총장을 전격 해임한 뒤 1990년 박노우 교수를 기습적으로 제3대 총장으로 선임했다. 이에 교수, 학생들은 직선총장을 요구하며 총장선임을 둘러싼 분규가 발생했다. 1990711일 박노우 총장의 취임식이 운동부의 호위 아래 서울캠퍼스 체육관에서 진행됐고, 이를 막으려는 학생들은 행사장 입구에 최루탄을 터뜨렸다.


 1993728일에는 손종국 이사장이 제4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취임에 성공한 손 총장은 서울 캠퍼스 폐쇄 및 서울공대 수원 이전을 계획했다. 이에 서울 학생 500여 명이 총장면담과 유도부 해체 및 폭력 사과를 요구하며 수원 캠퍼스로 왔고, 야구방망이를 소지한 운동부원 100여 명과 학생들 간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이효수(토목·87) 학생이 화염병에 맞아 온몸에 60%의 화상을 입었고, 오원택(관광경영·92) 학생은 광대뼈가 함몰되고 턱뼈가 부서지는 큰 부상을 입어 오랫동안 후유증을 겪었고, 군대에서 사망했다. 부대측의 발표는 부대내의 베란다에서 추락해 숨졌다고 하나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외에도 서울 학생들과 운동부 각각 20여 명이 크게 다쳤다. 이것이 본교 최악의 사건인 경기대첩이다.


총장 구속과 복귀시도(2004~현재)


 그렇게 학생들의 반발을 찍어누른 손 총장은 2004511일 수원지방법원에 배임수재로 구속기소돼 재판받았다. 결국 손 총장은 징역 26, 집행유예 4년의 형을 받았으나 꾸준히 본교로 돌아오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지난 2019819일 개최된 이사회에서 손 총장의 이사직 복귀 안건이 다뤄질 것으로 예고됐다. 이에 32In:K 총학생회 교수회 노동조합에서 이사회 항의 방문을 예고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장소·시간 변경으로 성명서를 포함한 항의 의사를 직접 전달할 수 없었다. 이에 하루 뒤인 20, 본교 중앙운영위원회 임원들이 손 총장의 이사직 복귀 철회와 이사진 사퇴를 주장하며 이사장실 점거 및 농성을 시작했다. 지난 201993일에는 손종국 총장 이사 선임 관련 학교 복귀 반대안건을 논의하는 임시학생총회에 3,070명의 재학생이 참여해 전원이 찬성했다. 작년과 올해도 교육부 방배동 경찰서 1강의동(진리관)에서 본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운동이 계속됐다. 결국 손 총장은 지난 630경기 가족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본교에서 전격 퇴진할 것을 선언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각종 논란으로 학내는 통합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김화연 기자 Ι khy7303@kyongg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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