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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동인과 화천대유
  • 편집국
  • 등록 2021-10-06 10:46:35
  • 수정 2021-10-06 10:5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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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역>>은 주나라에서 사용하였던 점서이다. 하나라와 은나라에도 점서가 있어서 여러 용도로 쓰인 전례가 있었다. 주나라의 점서는 공자가 본디의 괘사와 효사에 일정하게 원리를 발견하고 부여하고 정리하여 십익(十翼)이라고 하는 주석을 더해서 경전의 반열에 올리고, 그것이 동아시아문명권에서 수천 년의 주석과 해석을 덧붙이면서 새로운 용도로 변개하고, 각 시대마다 활용되다가 마침내 현재의 사상서로 자리를 굳혔다.

 오늘날에도 이 점서는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새로운 해석과 인간의 길흉사를 점치는 책으로 굳세게 사용되고 있으며, 이를 가지고 점서로서의 위세를 떨치고 있으며, 온갖 점집에서 시초점이나 여타의 방식으로 인간의 길흉사를 점치면서 서민의 마음을 달래는 것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예전에 선비나 사대부가 일을 벌이고 수습하는데도 사용하였고, 전쟁을 준비하고 승패를 점치는데도 이 책은 긴요하게 활용되었다. 그러니 이 점서는 일의 예단이나 길흉을 논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것이었다.

 암암리에 사용되는 것이 이제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서 일반적인 시사거리의 논쟁에 중심으로 이 점서의 괘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어서 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성남시의 대장동 개발을 둔 아무개 회사 이름이나 특정한 단체의 이름에 버젓하게 이를 올렸다. 전혀 몰라야 할 것은 아니지만 점서의 괘 이름으로 회사 이름이나 단체 이름을 올린 것이 기연이다.

 화천대유(火天大有)<<</span>주역>>14번째 괘 이름임을 이제 누구나 알게 되었으니 이만큼 <<</span>주역>>의 괘가 세속화하고 유명하게 되었다. 게다가 13번째 괘 이름으로 천화동인괘(天火同人卦)에서 이름을 딴 그 역시 특정한 단체가 있어서 더욱 괴이한 풍조를 맛보게 하고 있다. 그것의 진실성이나 사실성을 떠나서 이제 그렇게 멀게 느껴지던 <<</span>주역>>의 점서로서의 면모가 이처럼 확실하게 우리에게 다가온 것을 실감하면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하는 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면적 원리를 말하는 것은 이 괘사의 이름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지장을 주고 올바른 이해에 장애를 준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우주의 원리를 가지고 깨달은 바의 성인과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군자의 절절한 심정은 어디에 갔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이 준 것과 이 땅에서 실천하는 사람의 바른 도리를 말하고 이를 통해서 참답게 사람을 평안하게 하고 정치로서 풀어내던 아름다운 무늬를 볼 수 없어서 문제이다.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는 비결로 이를 활용하였다면, 이는 바른 도리에서 어긋난 삿된 것일 수 있다.

 게다가 이 두 가지 괘에서 문제되는 2번째 효사나 5번째의 효사에서 천하의 일을 도모하는 뜻까지 가지고 있어서 이에 대한 의문이 적지 않게 되어 있다. 군자나 임금의 자리를 거론하고 있어서 이를 통해서 이면적인 의도를 구현하고 새로운 질서를 재편한다고 하는 뜻까지 읽게 되면, 단순하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속에 숨은 뜻도 추정하여 헤아리게 된다. 무엇이 진실인지 그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천하를 도모하고,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원리로서 이를 사용한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 있어서 의아하고 모든 것 자체가 의문투성이이다.

 코로나19로 겪는 비극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 스스로 반성하게 한다. 되돌아와서 우리는 현실에 다시금 눈을 돌린다. 하루아침에 돈벼락을 맞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영업자가 견디다 못하여 자살하는 비극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세간에서 벌어지는 희극과 비극이 모두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삼천년 전에 있었던 이상한 점서의 질서를 우리의 오늘날 현실적인 일에다 꿰맞추고 이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이를 전혀 모르고 죽음이라고 하는 비극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오마르 하이염이 말한 바 있다. ‘성현들과 더불어 지혜를 씨 뿌리고/ 내 손수 공들여 가꿔왔지만 마침내 거둔 것은 다음 한 마디/ 나는 물처럼 왔다 바람처럼 간다고 하였다. 공자가 점서를 발견하고 이를 이렇게 사용하라고 했던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잠시 지구라는 땅에 자리를 빌려서 한 점으로 살다가 사라지라고 운명지어졌다. 현재 이 괘를 사용하연 한 일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잠시의 부유에 지나지 않는가? 남루하게 살면서 성실함으로 일관한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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